강화산성
1259년 고려가 개성을 환도하기 전 성을 헐었는데 조선초에 다시 보수됐다가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파괴됐다.
1677년 조선 숙종 때 다시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다시 파괴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근세에는 병인, 신미양요와 일본의 침략을 겪은 아픔의 현장이다.
성안에는 남쪽에 안파루, 서쪽에 첨화루, 동쪽에 망한루, 그리고 북쪽에 진송루 등 4대문이 있었다.
온갖 시련을 겪고 세월이 흐르며 성곽과 문루가 없어졌지만 지난 1974년에 남문을, 1977년엔 북문을 복원했고 서문은 다시 개축했다.
북문에서는 멀리 휴전선 넘어 장단과 개성의 송악산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고향을 북쪽에 두고 있는 이들은 이곳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한 뼈아픈 역사의 현장 강화성 서문 옆에는 연무당 옛터가 있다.
이곳은 강화부의 군사들이 훈련하던 집이다.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한 뼈아픈 곳이기도 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인천, 부산, 원산의 항구가 개항되고 새로은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지만, 결국 일본에게 36년 간 나라를 빼았기는 결과를 맞았다. 신문물이 들어온 현장임과 동시에 민족시련이 시작된 반성의 터다.
강화성에는 동서 양쪽에 두 개의 수문이 있는데 이 안에는 김상용 순절비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이었던 김상용 선생이 강화에 와 있다가 청군의 침입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강화성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김상용 선생의 후손인 김창국이 남문터에 세운 비가 바로 김상용 순절비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글씨가 마멸되자 후손인 강화유수 김매순이 원비와 같이 새 비를 세우고 옛 비를 비각 밑에 묻었다.
지난 1976년 11월 23일 고려궁터 진입로 확장공사로 비각을 옮기던 중에 지하에서 원비가 출토됐다. 지금은 원래의 비와 함께 새비가 나란히 서 있다.